목차
● 고대 시대
● 중세 시대
● 근대 시대
천문학사는 자연 과학으로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상고 시대부터 인류 문명과 함께 발달해 왔습니다. 천문학의 기원은 선사 시대의 신화적, 종교적, 점성술적인 행사에 기원합니다. 그 흔적은 민간과 관영의 천문학에 뒤섞여 수백 년 전에야 분리된 서양의 점성술에서도 남아 있습니다. 초기의 천문학에서는 관측할 수 있는 태양, 달, 별, 행성과 같은 천체의 규칙적인 이동 양식을 관찰하였습니다. 태양이 뜨거나 지는 곳이 지평선상에서 위치를 바꾼다거나 계절마다 보이는 별들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여 농사나 종교적 의식을 위한 시기를 정하였습니다. 문화에 따라서는 이런 자료가 예언에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천문학의 역사는 연대의 추이와 변화에 따라서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고 그 수준 또한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연구의 방법이나 목표 또한 발전하였습니다.
고대 시대
이집트, 인도, 중국, 바빌로니아 등의 고대 왕국이 번창했던 오리엔트 시대(기원전 약 50세기 ~ 7세기)에는, 달력 만들기나 별자리를 그리는 기술이 주로 농사와 제사에서의 필요에 의하여 일어났으나, 천체 현상을 신들의 계시로서 해석하는 신화적, 주술적 성격이 짙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4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우주를 논리적, 이성적으로 고찰하고,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 달, 5 행성인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그 주위를 공전한다고 하는 지구중심설을 구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천체의 시운동에서 볼 수 있는 지속, 역행 등의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기하학적 기구를 고안해 냈습니다. 천구상에서의 천체 상호의 위치 관계를 연구하는 구면 천문학이 이 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 시대
5세기~15세기 중엽 중세 시대의 유럽에서는 봉건제하의 암흑시대였음에 대하여 그리스 천문학은 아라비아의 이슬람 문화로 계승되었습니다. 이슬람의 문화에는 방위나 지점을 결정하는 실제 천문학에 대한 요구와 국가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에 대한 흥미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근대 시대
15세기 중엽~17세기 중엽 해양의 개발에 따라 개원된 과학 혁명 시대에는 원양 항해의 안전을 보증하기 위하여 항해력 즉 천체 위치 추산표의 개정이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원래 교황청의 교의의 하나로서 그 권위를 인정해 왔던 지구 중심설은 항해력 제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정당한 기초 이론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중심설을 채택하여 우주 체계를 전개하였습니다. 이 설에서는 모형적으로는 중심 천체로서 지구 대신 태양을 바꿔 놓은 것뿐이지만, 행성의 시운동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전 궤도의 모양을 종래와 같이 원형으로 보았기 때문에 항해력의 개량은 예기되었던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09년의 망원경의 발명에 의해 태양 중심설에 관측적인 근거를 만들어 주었으며, 또한 1638년에는 지상 물체의 실험에 의해서 천체 역학의 기초를 구축하였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종래의 행성 궤도가 원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케플러를 인정하지 못한 한계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케플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 티코 브라헤에게서 이어받은 화성의 관측 자료를 정리하여 행성 공전의 법칙을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을 바탕으로 정도가 높은 행성 운행표를 만들었으며, 항해자의 요망에 부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과는 단순한 기하학적 고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운동을 추적하는 운동학적 연구에 의하여 얻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케플러는 천체물리학을 제창해 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초를 구축해 낸 천체 역학은 1665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 17세기 중엽~18세기 후반 생산의 시대의 수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었습니다. 모든 현상의 원인을 힘의 작용으로 보는 기계론적인 자연관의 전성기에 또한 지상에서는 기계의 발명이 잇따르던 시대여서 천체의 운동 또한 역사적 이론에 의하여 해명되고, 1799년 라플라스가 이것을 집대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