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천문학과 점성술의 비교와 분열
● 천문학과 점성술의 구별되는 특성
● 천문학과 점성술의 역사적 분리
천문학과 점성술의 비교와 분열
천문학과 점성술은 고대시대에는 하나였고 같은 분야였으며, 서양의 17세기 철학 때부터 점차 구별되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8세기부터 그것들은 완전히 별개의 분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지구 대기 너머에서 비롯된 객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천문학은 과학이며 널리 연구되는 학과입니다. 천구의 객체의 외견상 위치를 심리학과 미래 사건의 예언, 밀교적 지식의 기본 원리로 사용하는 점성술은 과학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점술의 하나의 방식으로 한정됩니다.
현대 이전의 시대에 대부분의 문화권은 천문학과 점성술 이 두 분야를 모두 하나로 보고 그 두 분야에 명백한 구분을 두지 않았습니다. 점성술로 유명한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천체현상의 예언가로서의 천문학자와 그것들의 해설자로서의 점성술사는 역할 구분이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기능은 같은 사람에 의해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한 병행은 천문학과 점성술이 하나로 그리고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낙시만 드로스와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데스,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항성과 행성의 본질과 실체에 대하여 추측하였습니다. 에우독소스는 행성의 이동과 주기를 관찰했고 지구중심적 우주론의 체계를 정립했습니다. 그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했고 프톨레마이오스 때까지 일반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화성의 역행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을 가산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250년경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최초의 태양중심설 이론을 가정했는데 그 이론은 거의 2 천년기 동안 재고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적 체계가 선호되었습니다.
플라톤 학교는 철학의 일부로써 천문학 연구를 촉진했는데 왜냐하면 하늘의 움직임이 만물의 질서와 조화를 증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경에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이 그리스에서 그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성술은 학문적 회의론자인 카르테아데스와 중기 스토아학파의 파네티우스와 같은 헬레니즘 철학자등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성이 완전한 주기를 마치고 그것들의 상대적인 위치로 복귀하는 때를 일컫는 대년과 영원한 순환의 개념은 점술과 운명론을 가능하게 만든 스토아의 교의였습니다.
라틴어로 번역된 헬레니즘 점성가들과 아랍의 점성가들의 점성술 문헌들에 의해 점성술은 중세 유럽에서 널리 수용되었습니다. 중세 후기 그것의 수용 또는 거부는 유럽의 왕실에서 그것을 허가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때가 되어 점성술은 경험적 관찰보다 스콜라식 형이상학의 일부에 더 가깝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서양에서 천문학과 점성술 사이에서 더 결정적인 분열은 17세기와 18세기에 점성술이 더 비술적 과학 혹은 미신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점성가들이 점성술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주역과 같은 점술의 한 방식이나 예술 또는 신플라톤주의, 신지학, 신이교주의, 힌두교와 같은 경향에 영향을 받는 영적 신앙 체계의 일부로 여깁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의 구별되는 특징
천문가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주의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점성가들은 황도를 따르는 천체의 배치를 위하여 천문학의 계산법을 사용하였으며, 점성술의 각, 별자리의 위치등 천체현상에 현세의 사건, 인간사를 연관시키려고 합니다. 천문학자들은 일관되게 과학적인 방법과 자연주의적인 전제를 사용하고, 우주의 현상을 조사하거나 설명하는데 우주의 수학적 모형을 기본으로 한 추론을 끌어냅니다. 반면 점성가들은 우주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지척 예측과 혼합된 민속적, 상징적, 미신적 논리뿐만 아니라 그런 신비주의적, 종교적 논리를 사용합니다. 점성가들에게는 과학적인 방법이 일관되게 사용되지 않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중심이 없고 동적이며 빅뱅 이론에 의하면 외부로 팽창하는 우주를 추론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을 채택해오고 있고, 점성가들은 지구중심적으로 그들의 분야를 실천하고, 우주는 조화롭고 불변하고 정적이라고 여깁니다.
점성가들은 행성과 항성의 위치가 개인의 성격과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천문학자들은 실제의 행성과 항성을 연구해 왔지만 점성술 이론을 차지하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성격을 연구하는데 많은 성격 이론이 있지만 심리학에서 점성술을 기반으로 하는 주류적인 이론은 없습니다.
천문학자와 점성가는 양쪽 모두 지구와 우주는 서로 하나의 우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우주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지구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점성가들은 신비적이고 철학적으로 우주의 세속의 사건과 사람들의 삶에 활발히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적이며 초자연적이고 신격 본질이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과학계의 일원으로서 천문학자들은 그들의 개인적 신념과 상관없이 그들의 과학적 규약에 재한적 조건으로부터 경험적으로 파생되지 않는 설명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의 역사적 분리
점성술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점성술에 사용하기 위한 천체력을 더 정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천문학 연구를 지원했기 때문에, 천문학과 점성술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구별될 수 없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단어 Astronomia(천문학)은 천문학과 점성술이 실재적으로 구별 없이 공동으로 포함되는 것으로 두 분야 모두를 포괄하는 데 사용되곤 했습니다. 왕들과 다른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왕정의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왕실 점성가를 고용했고 그렇게 하여 천문학 연구에 자금을 댈 수 있었습니다. 의과 대학생들은 점성술을 일반적으로 의술의 실천에 점성술을 사용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은 17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하여 분리되었습니다. 코페루니쿠스는 점성술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튀코 브라헤와 같이 아이작 뉴턴 이전의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천문학자들은 직업이 점성술사였습니다. 그의 시대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는 테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론의 불어나는 인기에 힘입어 점성술에 대한 관심이 점점 쇠퇴되었습니다.
또한 그때와 관련하여 처음에는 항법의 보조기구였던 보다 나은 시간기록 장치의 개발이 있었는데, 더 향상된 시간 측정기는 검증될 수 있다고 했고 지속적으로 거짓임을 입증하는 더 정확한 점성술의 예언의 예언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18세기 말경 천문학은 그 당시까지 성문화된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계몽주의의 모범이 되는 주요한 과학들 중 하나였으며 점성술과는 전혀 다른 별개였습니다.